아마추어처럼 즐기고

프로처럼 달려드는 것

프로 VS. 아마추어





출처 : iMBC(www.imbc.com)


세상을 두 가지로 분류하는 단어는 많지만, 사회생활에 있어 프로와 아마추어는 극명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갓 입사한 신입사원 교육에서는 ‘프로’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업무상 실수가 생기면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라는 말을 듣기 일쑤. 하지만 이쯤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왜 반드시 프로가 되어야 하는가.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이 두 단어는 양극화되었는가. 능력을 쌓는 것이 아닌, 강요받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왜 반드시 프로가 되어야 하는가. 프로를 향해 달려갈 것이 아니라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명확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청춘의 소명이 아닐까.  




전문성이 프로와 아마추어의 기준?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서는 프로와 아마추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마추어는 무조건 내용을 갈고닦아 프로로 거듭나야 할까? 그럴 리 없다. 살다 보면 프로처럼 임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아마추어처럼 즐기면 그만인 때도 있다.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프로’란 프로페셔널의 줄임말로 ‘어떤 일을 전문으로 하거나 그런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 또는 직업 선수’를 일컫는 말로 ‘전문가’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반면 ‘아마추어’란 ‘예술이나 스포츠, 기술 따위를 취미로 삼아 즐겨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전문성’과 ‘취미로 즐김’이 두 개념의 차이인 것인데, 그렇다면 아마추어란 전문성을 배제한 채 그저 즐기는 것만을 포함한 개념일까?




출처 : KBS(www.kbs.co.kr)



여기서 우리는 ‘전문성’이라는 개념부터 짚고 넘어야 한다. ‘전문’은 ‘지식’의 많고 적음과는 별개로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의 개념에는 상당한 지식과 더불어 ‘경험’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지식은 서적이나 여타의 매체를 통해서 축적할 수 있는 것이지만, 경험은 이 지식을 바탕으로 시간을 들여가며 직접 부딪혀가며 체득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지식은 개인이 홀로 연마할 수 있는 것이지만, 전문성은 스스로를 포함한 타인과의 관계와 프로세스, 변수 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들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전문성의 유무를 통해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로와 아마추어, 힘의 ‘낄끼빠빠’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출처 : iMBC(www.imbc.com)



아무리 취미로 즐기면서 하는 아마추어라도 으레 시간이 지나고 많은 경험이 쌓이다 보면 전문성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프로의 입장에서 전문성이란 지식과 경험 외의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된다. 바로 ‘책임감’이라는 것이다. 책임감은 어떤 일을 끝까지 맡아 유연하게 마무리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우리가 여가시간에 취미로 즐기는 활동들은 책임감 없이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이 프로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는 말이 다르다. 취미는 선택이지만, 업무는 필수다. 일의 호불호를 생각할 수는 있지만, 수행의 여부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바로 프로의 세계다. 달리 말하면 일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를 티내지 않고 유연하게 마무리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프로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를 연마하고 갈고닦아 프로로 거듭나면 모든 일에 의연하게 대처하여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출처 : iMBC(www.imbc.com)



이기주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이제 주어진 일 앞에서 ‘아마추어처럼 즐길 것인가, 프로처럼 책임감으로 달려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프로처럼 임해야 할 일에 아마추어처럼 그저 즐기거나, 아마추어처럼 즐기면서 해야 하는 일에 프로처럼 달려들다가는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기 십상이다. 흔히 사회에서 아마추어라 불리는 신입사원들에게 요구되는 덕목 역시 바로 프로적 태도와 아마추어적 태도를 구분하여 적용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일 게다. 




행하고 즐기되, 책임지는 태도


회사에서의 직급 역시 프로와 아마추어를 분류하는 것이 아닌, 이 두 가지 태도를 적재적소에 적용할 수 있는 판단력의 정도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따라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책임감의 무게는 더해진다. 아마추어적 상상력과 프로페셔널한 책임감을 적절히 분배해 팀원들을 이끌어야 하기에 직급이 주는 무게는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데 드는 에너지·긴장감 등과 비례할 것이다. 즉, 직급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기준이 아닌, 일에 임하는 태도를 결정하는 노련함과도 같다. 




출처 : KBS(www.kbs.co.kr)



우리는 늘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업무적 스킬을 쌓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시간이 지날수록 스스로를 옭좨는 굴레가 되어 자유로운 상상력과 일에 대한 즐거움을 사장시켜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프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아마추어처럼 즐기되, 프로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달려드는 것.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이를 실천해나가는 것. 그리고 이 사이에서 좀 더 균형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렇게 되면 우리는 프로와 아마추어라는 이분법적 개념에서 벗어나 스스로 즐기고 책임질 수 있는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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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지만, 궁금해

화나지만, 알고 싶어


남자 VS. 여자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 제목처럼 남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서로를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 여자에게는 여러 가지 핑크색이 존재한다는 것에 남자들은 영영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테고, 남자들의 머릿속은 의외로 직관적이고 놀랍도록 단순하다는 사실을 여자들은 영영 이해할 수 없을 테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파악하기 위해 온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평생 혼자 살겠다고 머리 밀고 굳게 다짐했거나 사랑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모를까 우리는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 서로 너무 다른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의 교통사고와도 같으니까. 이를테면 ‘보험’을 들자는 거다. 




그래, 달라. 하지만 틀린 건 아냐.





티브이 채널을 하릴없이 돌리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엄마가 망치에 손을 다친 척하며 아파하고 있을 때 여자 아기와 남자 아기의 반응 차이를 살펴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결과는 무릎을 ‘탁’ 치게 하기 충분했다. 예상 가능하듯, 여자 아기는 엄마의 아프다는 신호에 깊은 동조를 표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엄마의 얼굴과 다친 손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같이 눈물을 터뜨리고 만다. 반면 남자 아기는 엄마가 아파하자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긴 하지만, 딱 그뿐,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건지, 엄마가 왜 우는 것인지 도통 관심이 없다. 멀뚱히 쳐다보거나 이내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자리를 뜬다. ‘이야, 이래서 남녀는 태생부터 다르다고 하는구나!’ 예상은 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한 남녀의 성향 차이는 너무나 분명해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난다.


맞고 틀림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은 가시적인 ‘차이’를 확인하고, 비가시적 차이는 얼마나 더 클지 예상해보자는 것이다. 굳이 남녀를 구분하지 않아도 좋다. 세상에는 매우 많은 사람이 있고 이들의 생각과 성향은 각기 다르며, 그래서 한 개인은 세상 모든 이들의 생각이나 행동의 이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많은 예제 중 ‘일반적’이라 일컫는 것들의 차이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불특정 다수의 패턴이라면 언젠가 이 ‘일반적인’ 사람과 엮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항상, 늘 그래왔을지도 모르고. 




다르니까 다투는 건 어쩌면 운명이야.


실험 속 남녀 아이의 행동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여자 아기가 엄마의 아픔에 눈물로서 공감을 표했다면, 남자 아기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지 않는다. 되려 웃어버리는 아기도 있었다. 이는 ‘공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남자 아기가 반응이 없었다고 해서 이는 잘 못된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이를 ‘뇌’ 구조의 차이라고 말한다. 남자는 주로 감정을 관할하는 부위가 우뇌에 분포되어 있지만, 여자는 좌우뇌 모두에 고루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남자보다 여자가 감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뇌 구조에서 발생하는 공감의 차이는 남녀의 성향 차이를 만들어내는 주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여자는 늘 더 이해받길 원하고 남자가 자신의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서 더 깊이 공감을 표해주길 원한다. 여자가 (뇌 구조적으로) 원하는 공감의 정도와 남자가 (뇌 구조적으로) 할 수 있는 공감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다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는지. 앞서 계속 말해왔지만, 남녀는 태생적으로 뇌 구조가 다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갈등은 누구나 한번쯤은 맞닥뜨리게 되는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섬세한 감정선을 가진 여자의 뇌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여자의 감정선은 부정적 감정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관련 없는 일까지 부정적 감정 안으로 편승시켜 버린다. 하지만 남자는 ‘슬픈 건 슬픈 거’고 이성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해결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상호보완이 되는 이 아이러니.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와 다른 성(sex)을 가진 저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의 ‘핑크’를 인정할게, 너의 ‘(나름) 이성적인 생각’을 받아들일게.




출처 : 네이버영화(http://movie.naver.com)



핫핑크, 베이비핑크, 인디핑크, 코랄핑크 등등 핑크의 세계(?)는 왜 이렇게 무궁무진한 것인지 남자들은 그야말로 ‘노이해’. 반면, 딱 봐도 다른데, 너무너무 다른데 100가지 핑크를 다 합쳐 그저 핑크라 부르는 남자들이 ‘노이해’인 여자들. 


그냥, 우리 섣불리 이해하려 들지 말자. 솔직히 말해서 포기할 건 포기해야 오히려 더 돈독해지는 것이 관계다. 태생적으로 다른데 어쭙잖은 후천적 학습으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오히려 상대방을 좀 더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뇌 구조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겠어? 강요한다고 되는 부분이 아냐!’라는 주문을 외워보는 것도 좋겠다. 


늘, 언제나, 관대하게 바라보라는 것은 아니다. 특정 문제에 있어 서로의 다른 생각을 공유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지 상대방에게 ‘설명’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백 퍼센트 이해하긴 힘들지만,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구나’를 표현하고 상대가 알게끔 하는 것이야말로 남녀 사이의 선행 과제가 아닐까. 차이를 이해시키기보다는 그저 알려주는 것, 그리고 이를 주의 깊게 경청하고 생각의 방향을 달리해보는 것부터가 ‘남자 VS. 여자’에서 ‘남자 & 여자’로 가는 왕도일 테다. 



그러니 다들, 가끔은 멀찍이서 서로를 관망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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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로의 역행 혹은 회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위험한(?) 동행





바야흐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이상하리만치 공존하는 시기. 서로 대비되는 이 두 가지 개념이 화두가 된 때와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과연 디지털이란 무엇일까? 이는 반드시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일까? 수많은 디지털 기기와 프로그램 안에서 한층 더 편리한 삶을 영위해가고 있는 지금, 아날로그적 감성이 오히려 더 많은 이슈를 생산해내고 있는 이유는? 우리는 왜 아날로그적 ‘회귀’를 꿈꾸는 것일까? 




잠깐 우리 생각할 시간 좀 갖자, 디지털!


사전적으로 아날로그란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용어’다. 예를 들어 전압이나 전류의 변화·크기 등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반면 디지털이란 라틴어 디지트(Digit)에서 유래한 말로 손가락이라는 뜻을 가지며, 0과 1로 이뤄진 이진법을 사용해 각종 조합을 만든 후, 이를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만들어내고 전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이 디지털에 대한 각종 연산을 수행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컴퓨터이니, 아날로그로 대변되는 ‘과거’에서 디지털로 상징되는 ‘현재’로의 변화는 어쩌면 당연한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화를 통해 우리는 생각을 데이터화하여 좀 더 효율적이고 빠르게 전달할 수 있게 있게 되었고 이는 경제적 가치로 직결되어 대량 생산과 소비를 가능하게 했으며 커뮤니케이션 방식마저 바꾸어 놓았다. 그렇다면 디지털화를 통해 정보를 분류하고 기호화하여 빠르고 간편한 생활을 하게 된 지금, 우리는 이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을까? 기호화, 체계화된 세상 속에서 한층 새롭고 경쟁력 있는 것을 찾고 또 찾는 일련의 과정들을 ‘시대의 흐름’이라는 주류에 편승해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일까?


아날로그로의 역행 혹은 회귀는 바로 이러한 물음에서부터 시작됐다.




우리 다시 만날래, 아날로그?




▲ (윗줄) TV 프로그램 '쎄시봉', (아랫줄) 영화 '쎄시봉'

출처 : MBC(www.imbc.com), 네이버 영화(movie.naver.com)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2011년부터 시작된 ‘쎄씨봉’ 열풍과 작년 한해 ‘응답하라 1988’ 흥행은 아날로그를 열망하는 대중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시절의 통기타 문화와 이웃의 정이 자유롭게 담벼락을 넘나들었던 과거의 향수가 디지털 시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0과 1로 데이터화된 세상 속, 이분법으로는 답할 수 없는 ‘가변적’ 상황이 아날로그라는 큰 흐름을 다시금 상기하게 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휴대폰이 없던 시대에도 젊은이들은 각자 알아서 ‘잘’ 연애를 해왔고, 약속을 잡고 만나는 것도 큰 불편함 없이 ‘잘’ 이뤄져왔다. 오히려 1인1스마트폰이 일반화된 지금, ‘연애=연락문제’가 되었고, 약속의 무게는 깃털처럼 한없이 가벼워졌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파악을 빨라졌지만, 오히려 직접적인 만남에 대한 필요성은 줄었다. 이 모든 것이 디지털 시대의 그늘이라 단언하긴 어렵지만, 어찌됐든 사람들이 이제 이러한 ‘기계화’된 관계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디지털 문화 속에서 한줄기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찾고 이에 열광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문화적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친해지길 바라!



▲ 디지털 시대의 소통 창구인 각종 SNS



그렇다고 해서 모든 디지털 문화 혹은 기기들을 ‘냉철함’, ‘정확함’, ‘계산적’이라는 단편적 특성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0과 1로 이뤄진 이분법적 세상인 디지털 매체 속에도 엄연히 ‘가변적’ 상황들, 이를 테면, SNS로 연결되는 감정적 교류라든지, 정보의 확산을 통해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일 등은 디지털 매체를 수단으로 한 아날로그의 또 다른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았을 때 어쩌면 디지털이란 아날로그의 한 부류로서 흔히 말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매개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기계’, ‘아날로그=인간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역시 디지털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매우 경솔하다는 사실이다. 광속으로 변화하는 디지털의 흐름에 휩쓸려 전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아날로그적 창조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이 디지털 시대로 이어지고 진취적·진보적 문화와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려면 아날로그의 유연함과 디지털의 속도가 적절하게 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아날로그로의 회귀는 ‘창조적 사고의 필요성’의 다른 말이며, 좀 더 진화된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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